때는 19세기 러시아 1850년대. 한창 러시아는 혁명이라는 시간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러시아의 두 인텔리겐치아 청년의 이야기. 한명은 니힐리즘에 빠져 모든 권위와 권력, 그리고 기존의 규칙을 무시하고, 이러한 친구의 모습을 닮아가고자 무던히 노력하는 또다른 청년의 이야기다. 변화해가는 유럽의 문화와 새로운 학문의 분위기를 배운 두 청년은 오래된 농노제도와 불합리한 기존 방식이 옳지 않다고 느끼지만 정작 부모와의 만남을 통해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자라왔던 집안의 분위기와 그 바탕이 되었던 사회제도의 견고함까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더구나 우연히 조우하게 된 한 여성으로부터 지금까지 부정하던 낭만주의(?)적 분위기와 욕망을 스스로의 내부에서 느끼고는 괴로움에 휩싸이게 된다. 바로 사랑이라는 단어. 이는 부모님과의 감정적 교류와 혼합되면서 그동안 자신이 부정하던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짚어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한 친구는 그 사랑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또다른 시작점에 놓이게 되고, 다른 한 친구는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마지하면서 스스로의 고백으로 끝을 맺는다.
이미 지나가버리고 있는 세대의 상징인 아버지와 이제 막 꽃을 피우려 그 화려한 몸짓을 하는 아들의 모습을 사건과 대화를 통해 드러내는 소설이다. 감정의 흐름과 생각의 변화를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중요히 자리하고 있는 사랑, 자연의 의미를 감추는 듯, 감추지 않는 듯 잘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세대간의 충돌이 피를 부르기도 하지만 곧 화해의 제스쳐를 통해 다시금 사회의 또다른 성장, 발전의 의미까지 잠시 느껴볼 수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들로 분류되는 두 청년의 이야기가 마음에 다가왔다. 소설속에서 드러냈듯이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그들에게 아버지 세대는 변화해야만하는 대상일 뿐이다. 나 역시 20대 초반 이러한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소설속의 아들들 처럼 때로는 거만하게, 때로는 무시하며 부모님 세대의 부조리함을 지적질 했던 것이 기억났다. 때로는 겪하게 대립하기도 하였으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모님 세대에 대한 불신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제 얼마 후면 40이 눈 앞에 보이는 나이가 되니, 변화지 않는 사회의 안타까움과 어느정도의 타협, 그리고 혈기왕성했던 그 에너지가 줄어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더 지혜롭게 대하며, 서로의 상처를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한 것에 후회가 넘나든다. 더구나 나 역시 조만간 기성세대라고 불리우는 나이가 되어가면 갈 수록 한편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다만 아직도 내가 버리지 못하고 중요하게 지켜야 한다는 기준은 모든 것은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과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즉 오래전 부모세대와의 투쟁의 근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다만 문제에 대한 방식과 대안의 고민은 끊임없이 지속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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