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웠던 중세 기독교 사상의 그림자.
1327년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윌리엄 수도사와 이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아드소의 기억이 재구성되는 이야기이다. 이 살인사건들은 수도원에서 발생하는 비밀스럽고 불미스러운 원인을 뛰어넘어 당시 기독교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천천히 그리고 여실히 드러낸다. 로마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정교화를 지나서 천년이 흐른 14세기의 기독교는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사회구성의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 기독교 신의 대리자로 불리우는 교황과 세속사회의 지배 권력인 왕권의 충돌은 권력의 아귀다툼으로 점철된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힘없는 사회구성원들은 마녀라는 이름으로,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갖은 고문과 화형의 제단에 목숨을 잃어간다. 또한 자연은 신의 존재와 섭리를 담고 있는 고귀한 대상이기에 함부로 연구하거나 신학에 반하는 해석은 불가능 했다. 바로 과학의 암흑기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신의 권위 또는 정통성이라는 이름으로 해석되고 판단되던 때였다.
이런 시대에 이제야 발현되기 시작한 자연과학적 관점과 신앙의 조화를 꿈꾸는 윌리엄 수도사의 행동은 위태로워 보인다. 주류 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이단의 냄새가 풀풀날 수 밖에 없으니 오래되고 정통성 있다는 사람들에게 공격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런 공격들에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또는 전통적인 신학의 이해를 뒤집어 생각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얄팍함을 지적한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권위와 정통성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들 또는 신앙고백들의 총화로부터 자신 스스로 해석하고 도출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윌리엄 수도사와 반대에 있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지켜운 금단의 장서관을 유지하며 스스로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할 뿐이었다. 그것도 세상의 모든 책들을 모으고 금서라 불리는 이단의 책들까지도...
진리는 희망하는 것이다.
세상에 남겨진 글자와 책들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 책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지식을 채우고 경험을 정연화한다. 그리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진리’라는 단어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진리의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럼 이런 진리의 원리에 권위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일까. 또는 객관적 진리란 가능한가? 또는 유구한 역사를 흐르는 그 내면에 절대로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글세... 잘 모르겠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난 뒤 더 유능하고 천재적인 인물이 나타나 진리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런 진리를 모른다. 오히려 그 진리를 찾아 떠나는 행렬을 하나 둘 모아 그 희망을 이을 수 있다면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이 ‘진리’의 모습이 그때마다 모두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 진리는, 때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P 239 E-book 상
- 세상에 이단 아닌 것 없고 정통 아닌 것 없다. 어느 한 세력이 주장하는 신앙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이 약속하는 희망인 것이야. P 316 E-book 상
- 신학적 미덕에는 믿음 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고 또 하나는 가능하다고 믿는 인간에 대한 자비이다. P 105 E-book 하
그리고 성서는 꿈들의 집합체.
그렇기에 이런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주 오래된 정통을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우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때론 우리의 시대에 맞게 새롭게 고쳐 다시 생각하는 방법 역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삶의 문맥을, 글의 문맥을 완전히 뒤집음으로써 그 내면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방법 역시 가능하다. 이 마지막 방법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온 무언가를 극적으로 반전시킴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강렬하게 우리의 삶의 되짚어보게 만들고 진리의 느낌과 형체를 직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농담을 통해, TV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서 말이다. 웃음과 즐거움 속에 진리를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전통적 또는 권위적 해석방법에서 멸시되기 일쑤다. 뭔가 세련되지 못하고 정리되어있어 보이지 않는다. 때론 너무나 가볍고 비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무시하거나 위대한 것을 오히려 낮은 것으로 만드는 전환기를 만들어 주류 또는 정통성을 한낮 모래알로도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변화의 시기를 준비하고 희망을 갖을 수 있게 된다.
예수가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물론 지금까지 남아있고 기록된 성서의 내용을 본다면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것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당시 생활인으로서 살았던 예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주변에 같이 살던 사람들과 부대끼며 웃고 떠들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 예수를 상상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그들의 희망과 소망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며, 느끼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알게 된 것을 아닐까.
- 꿈은 곧 성서이다. 그리고 성서의 많은 기록이 곧 꿈 이야기지... P 293 E-book 하
PS. 읽기를 완료한 것은 벌써 2주가 넘었는데 이제야 정리가... 그만큼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책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때 신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둔 적이 있었기에 너무나 흥미로웠다. 하지만 언어학과 기호학에 대한 석학인 에코의 첫 장편소설이라 그런지 상징적인 요소와 다양한 언어적 요소를 버무려 놓은 듯하여 쉽지 않았다. 특히 라틴어문구가 마지막까지 이어질 정도로 상당히 많이 나온다. 그래도 추리소설의 형태를 차용하여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Bookcase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의 계승자 / 제임스 P. 호건 / 아작 (0) | 2022.02.01 |
---|---|
위대한 개츠비 / 스콧 피츠제럴드 /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0) | 2022.02.01 |
공중그네 / 오쿠다 히데오 / 이영미 번역 / 은행나무 (0) | 2022.02.01 |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 양윤옥 번역 / 은행나무 (0) | 2022.01.31 |
나나 / 에밀졸라 / 문학동네 / 김차수 옮김 (0) | 2022.01.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