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해가 되면 가장 먼저 찾아 읽으려 노력하는 작가. 20대에는 혼란스러웠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워주었고, 30대에는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40대에 접어들어 다시 집어든 그의 이야기는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지금 잘 하고 있다는 위로를 전해주는 듯 아름다운 문체와 매력적인 이야기로 다시금 빠져들게 만든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많은 사람들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 목적을 위해 오늘도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다. 어떤 이는 부를 위해서, 어떤 이는 명예를 위해서, 어떤 이는 사상을 위해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또는 그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듯 해 보이기도 하며, 주변의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의 목적을 방해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 목적만 이루면 모든 것, 특히 자신의 만족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위안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목적을 잘 모른다. 그 목적이 정말 구체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제 존재하는 것인지도 잘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정말 내가 생각하는 또는 원하는 목적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혹하거나 사회의 구조속에서 주어진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스스로 선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작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살다가 나이가 들고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지금까지 가져왔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도 잊어버리게 된다. 희미한 기억속에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결국 인생은 허무한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증명하며 한 줌의 재로 다시 돌아간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완성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도 아닐세, 그럼, 이 세계는 매 순간 완전하며, 모든 죄는 이미 그 속에 은총을 품고 있고, 모든 어린아이는 이미 그들 안에 노인을 품고 있고, 모든 젖먹이는 이미 그들 안에 죽음을 품고 있고,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 안에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네.”
그럼 인생의 결과로 목적의 허무함만 남는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일까. 싯다르타는 그것이 의미가 되었든, 아니면 목적이 되었든 가장 먼저 스스로의 내면에서 찾아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자아라는 말로 표현하기는 언어의 폭이 좁아 보인다.) 이미 존재해 왔으며 세상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그 실체(도는 실제)를 보기위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잘 보이지 않도록 먼지가 쌓인 어떤 사물과 같다. 매일 매일 걷어내는 먼지들로 실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보여지는 그 실체가 그 자신에겐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내일에도 새로 시작될 것이고 다음주에도 새로움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하루하루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놀라게 되며, 그것이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슬픔과 분노가 있을 수 있다. 부끄러움은 물론이거니와 당황하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생각했던, 또는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론 좌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실체와 대면하게 되면 그마저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거부감이 들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으나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며 이 세상만물의 모든 것들을 속에 있는 그 ‘단일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이런 이해가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실체가 선한 것인지 또는 악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아니면 이런 선악의 구분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 속에서 외부의 의미와 목적에 매몰되어 자신을 보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의미없는 삶, 또는 목적없는 삶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우리 인간의 삶은 결국 이러한 의미를 목표를 외부든 내부든 끊임없이 찾아가는 여정에 놓여있다. 그 속에서 봐야 할 것들을 외면하지 말고 조금은 그 주변을 바라고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풍부하게 만들 것이고, 그것들이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P.S.
생각해보니 이 싯다르타라는 책은 대략 10년 전에 읽은 것 같다. 온라인 서점에서 새로 번역되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구매하여 단숨이 읽어내려갔다. 10년 전의 느낌과 당연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 당시의 상황과 느낌은 이미 지나간 것이며 다시 새롭게 읽혀지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음 10년 후에 다시 읽는다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많이 기대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헤르만 헤세의 책 중 가장 아끼는 책 중 하나이다. 그만큼 위로를 주었고 힘을 되어 주었던 책이다. 종교적인 의미와 색체가 강하다고 하여 마냥 거부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이다. 현재 헬반도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으며, 꼰대가 되기 시작한 이들에겐 반성과 새로운 삶의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라 생각한다.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외에 두 권의 책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유리알 유희라는 책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젊은이들에게, 유리알 유희는 꼰대가 되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다보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상황의 묘사와 심리의 이야기들이 잘 어우러져 문체만으로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민음사 번역본도 읽어봤지만 이번 문학동네에서 번역된 문체는 정말 괜찮았던 것 같다. 찾아보니 민음사 번역은 1997년 이다보니 오래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라는 책은 어떤 번역본을 읽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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