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어딘가에 있는 작은 부족에 살고 있는 작은 소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날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외딴집에 살게된다. 납치의 후유증으로 한쪽 귀를 잃고 자신의 집은 어디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잊어버린채 어떤 여인의 집에서 그 여인이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직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그녀 '라일라'는 지금 자신을 보호해주는 주인 여자에게 의지하여 하루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금새 그 집을 떠나게 만든다. 그리고 시작되는 고난의 연속. 가녀린 흑인 소녀가 감내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일들이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불분명한 국적으로 인해 하루도 편하게 쉬지 못하고, 조금이나마 좋은 사람들을 만나 안락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돌변하는 사람들. 그리고 상처. 그래서 또다시 이러저리 길을 떠나야 했던 그녀는 하나하나의 사건을 거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결국 그녀는 편안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바로 떠나야 하는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자신의 위로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게 된다. 오히려 거리의 뒷골목이나 음침한 곳,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 바로 그녀에게 안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내면의 울림과 떨림. 어렸을 적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근원적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동안 누군가에게 쫒김 또는 사회적 억압을 벗어나 점차 스스로의 자유를 되찾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그 자유를 찾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이미 그녀에겐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습관, 또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안함이 찾아온 순간 그녀는 다시 어디론가 떠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숨어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떠남이 그녀에게 스스로의 시작을 찾아가는 무언의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순간순간 울려나오는 북소리의 울림과 저 멀리 바다에 대한 원인모를 향수는 그녀의 근원을 찾아가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윽고 마주하게 되는 근원의 장소. 또는 근원의 어머니. 그녀가 자궁 속에 품고 있는 아이의 시작과 자신의 새로운 시작이 이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듯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는다.
납치당하여 역경의 삶을 살아가야하는 작은 흑인 소녀의 이야기. 단순한 성장소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불합리한 대우를 받야했으며, 고난의 역사를 짊어지고 있는 흑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를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선 흑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인간적 모멸감과 불합리한 처우를 받아야 했던 역사의 흐름. 그 속에서 드러나는 유럽인들의 가려진 그늘. 문명사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의 반문명을 타자에게 강요하고 폭력을 일삼는다. 이러한 이중성을 깨달은 라일라는 항상 프란츠 파농의 책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리고 소중한 이 책을 또다른 폭력이 나타나고 있는 미국의 한 인디언 여성에게 선물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흑인이라는 인종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어진다. 발전된 사회, 문명화된 사회를 꿈꾸고 지향하고 있는 우리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오히려 퇴보하는 사회의 모습과 반문화적인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한 순간도 어디엔가 안착하지 못하고 이러저리 떠도는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떠돌아다님은 어디에서 종결될 수 있을까. 항상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라일라는 그 안식을 자신이 태어난 곳,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늙은 어머니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태어나기까지 우리를 보듬고 아끼던 존재. 또다른 자신의 분신이며 새로운 존재를 인정해주는 어머니. 이러한 어머니는 나와 아버지를 이어주고, 형제를 이어주고, 가족을 넘어 지구 전체의 사람들을 이어준다. 그렇기에 또다시 태어나는 아이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라일라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주름진 손등을 어루만진다. 아주 조심스럽게.
잘 만들어진 한편의 프랑스 예술 영화는 보는 듯 했다. 한 소녀의 성장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그리고 풍경의 묘사가 섬세하다. 그렇다고 과도한 묘사로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의 풍경을 영상으로 떠올리게끔 만들도록 묘사한 것이 일품. 또한 순간순간 감정의 흐름 역시 섬세하게 묘사하였고, 소녀의 성장을 따라가며 그 울림을 느낄 수 있게 만든 소설이다. 다행인 것은 번역 역시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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