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책을 접하고 나서 세 권이나 되는 분량이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권 당 400페이지를 넘는 분량은 언제나 다 읽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난 번에 읽었던 화차의 경험이 있었고 장르소설이라는 특징으로 그리 오래걸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단 숨에 1권을 끝내고 다음 권으로 넘어갔다. 그만큼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매력이 넘치는 소설이었다.
엄청난 분량의 책을 과연 어떻게 풀어 나갈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애매하게 글을 지루하게 늘여놓으면 그만큼 책의 재미는 반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걱정을 내려놓게 만든다. 그 구성부터 특이했던 것이다. 총 3권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하나의 사건을 다룬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과 관점을 보여준다. 1권의 경우 전반적인 사건의 일단락으로 끝을 맺으며 빠른 이야기 전개와 사건을 진행을 스릴넘치게 보여준다. 2권은 사건을 일으킨 범인들의 내면과 시각, 그리고 배경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2권에서 묘사하는 범인의 내면과 불안감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묘사에 멈추지 않고 작가가 의도하는 무언가를 이어주는 길잡이의 역할을 충분히 해 준다. 왠만하면 상상하고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나 역시도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서늘한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3권은 진짜 범인의 등장과 사건을 추적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듯 잘 짜여진 구성은 책을 쉽게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왔음에도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하여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 ‘모방범’이라는 소설이, 또는 미야베 미유키라는 사람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화차’를 읽어 본 경험이 있기에 조금은 쉽게 그 내용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3권으로 넘어가 마지막 장에 도달할 때까지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아니 쉽게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헷갈리는 마음으로 책을 덮고 읽으면서 적어 놓았던 것들을 하나하나씩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유행어가 되기도 했는데 말이야. 요즘은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사라져버려도 ‘증발’이란 말을 안 써. 사회현상으로 주목하는 경우도 없고. 하기야 실종이 일상사처럼 되어버렸으니...” _ P63
“요즘 시대는 폼나고 그럴듯한 멋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거야. 할아버지처럼 나이 든 늙택이는 살아갈 가치도 없어.” _ P130
"구리하시 히로미는 기시다 아케미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두 개의 인격을 보았다. 아케미가 가난뱅이 냄새 나는 식당이라고 경멸하는 장수암이 자신이 자라난 환경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강하게 반발하는 자신과,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공감하고 그녀의 혐오감을 이해하는 자신. 그것은 마치 아케미가 부모의 재력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도쿄 사람에 비하면 촌뜨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신의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구리하시 히로미에게 집착하면서 인격의 분열을 겪는 것과 너무도 흡사했다." _ P481
일본의 버블경제가 막을 내리고 사회적 혼란이 시작되었던 시기. 하지만 그동안 경제적 성장으로 다양한 혜택과 문화적 수혜를 받고 자란 새로운 세대의 사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서 구세대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사회와 문화는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고, 이 둘의 충돌은 혼란이라는 단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각 세대에는 각자의 이유와 변명이 있다. 삶의 조건과 내용이 달랐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변동과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런 현상이 발생하고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분리되기 시작하였고, 개인의 이기적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서로가 의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지만 결론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가지 가능성, 또는 시도해 볼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구세대가 그동안 겪어 온 경험과 노련함이 새롭게 시작되는 신세대와 잘 조화되었을 때 하나의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이러한 생각에 대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전쟁세대와 전후세대가 공존하는 우리나라 또는 일본의 상황에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내용이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어져 오던 삶의 방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로 변화하고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라는 것. 빠르고, 자극적이고,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사회로의 진입. 그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고, 개인의 보신에만 집중 할 수 밖에 없는 사회. 추리소설 한 권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음에 읽어 볼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낙원’이라는 소설. 하지만 이번 가을에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나 많이 쌓여 있어 다음 여름으로 미뤄야 할 듯하다. 무더운 여름에 읽기에 딱 안성맞춤이라 생각된다.
PS _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소설이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많지는 않지만 독특하게 읽은 일본소설들이 많았기에 그런 느낌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번역이 잘 되어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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